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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희 작가와 나는 협회 활동을 하면서 평소 몇 차례 교류했지만, 몇 마디 <臺詞> 없이 지낸 사이다. 내가 기억하는 김명희는 자신의 생각을 장황하게 설명하기보다 최소한의 언어와 가벼운 미소로 답하는 사람,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김명희의 모습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臺詞館>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준비한다며 평문을 부탁해 왔다. 평소의 인연과 친근함으로 별다른 망설임 없이 응했지만, 막상 작품과 작가노트를 앞에 놓고 보니 생각은 달라졌다.
서예미학을 연구해 온 필자의 눈에 영화라는 시간예술의 언어가 붓과 먹이라는 문자예술의 언어로 전환되는 과정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그렇게 작품 한 점 한 점과 작가가 남긴 글을 따라가면서, 이번 전시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내밀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평소 최소한의 말과 미소로 자신을 드러내던 김명희가 이번에는 영화 속 타인의 말을 빌려 자신의 ‘대사’를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가 선택한 한 줄의 대사와 붓끝에 남긴 흔적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내가 내 스스로에게 던진 이 질문이 나를 「대사관(臺詞館)」으로 향하게 하는 이유다.
한 가지, 「대사관」에 들어서기 전에 감상의 준칙을 말해두고 싶다. 김명희의 작품 앞에서는 잠시 전통서예의 미적 척도를 내려놓기를 권한다. 점획의 骨肉血氣와 氣韻生動, 필력의 경지를 말하는 入木三分, 자연의 이치와 서법의 합일을 말하는 書法自然과 같은 전통적 관념만으로 그의 작품을 재단한다면 이번 전시가 품고 있는 또 다른 이야기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명희가 보여주려는 것은 필법의 완성이나 기교의 극치가 아니다. 한 줄의 대사가 자신의 삶을 지나 기억을 흔들고, 그 기억에서 다시 일어난 미세한 감정이 어떻게 붓끝을 거쳐 문자와 이미지로 형상화되는가에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 앞에서는 ‘얼마나 잘 썼는가’보다 ‘왜 이렇게 썼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점획의 기교보다 그 획을 움직이게 한 마음을, 완성된 글씨보다 그 글씨 뒤에 머물러 있는 한 인간의 기억과 감정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대사관」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감상법일 것이다.
대사관 가는 길
20세기 독일 출신의 영화이론가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 1889–1966)가 영화에서 ‘현실을 새롭게 발견하고 경험하게 하는 힘’에 주목했다면, 미국의 철학자이자 영화이론가 스탠리 카벨(Stanley Cavell, 1926–2018)은 영화를 통해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새롭게 사유하였다.
크라카우어가 영화의 본령을 물리적 현실을 ‘기록하고 드러내어’ 그것을 관객으로 하여금 다시 경험하게 하는 데서 찾았다면, 스탠리 카벨은 그렇게 경험한 영화가 다시 우리의 기억 속으로 들어와 삶의 일부가 된다고 보았다.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영화이론: 물리적 현실의 구제』,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60, p.40; 스탠리 카벨, 『바라본 세계: 영화의 존재론에 관한 성찰』,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증보판, 1979.
또 헝가리의 영화 미학자 벨라 발라즈((Béla Balázs, 1884–1949)는 영화가 인간의 얼굴과 몸짓을 통해 언어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내면을 가시화한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클로즈업을 영화 고유의 표현 방식으로 주목하면서, 확대된 얼굴의 작은 주름과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조차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커다란 사건을 드러낸다고 하였다. 나아가 얼굴의 클로즈업을 ‘전체 드라마의 서정적 정수’라고 표현하였다. Béla Balázs, Visible Man, or the Culture of Film, trans. Rodney Livingstone, in Béla Balázs: Early Film Theory: Visible Man and The Spirit of Film, ed. Erica Carter, New York·Oxford: Berghahn Books, 2010.
그 중에 영화의 대사는 배우의 목소리와 표정, 몸짓과 침묵, 음악과 화면을 만나면서 문자로 기록된 문장 이상의 생명력을 얻는다. 발라즈가 영화의 클로즈업과 인간의 표정에서 내면의 미세한 감정을 가시화하는 영화의 힘을 발견했던 것처럼, 영화 속 한마디 역시 인간의 내면을 밖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예술적 언어가 된다.
김명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대사관(臺詞館)」 은 특별한 전시가 된다.
1관 〈인생영화관〉
“한 줄의 대사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김명희 작가의 변이다.
발라즈가 카메라를 인간의 얼굴 가까이 가져가 그 속에 숨어 있던 내면을 발견하였다면, 이 작가는 영화 속 한 줄의 대사를 자신의 삶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수많은 대사 가운데 유독 자신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은 한마디를 선택하고, 그 말을 오래 바라보면서 ‘왜 이 말이 나에게 남았는가’를 되묻는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그가 클로즈업하는 것은 영화의 대사지만, 그 대사를 발견하는 사람은 결국 작가 자신이다. 실제로 작가는 한 줄의 대사를 발견하면 왜 그 말이 마음에 남았는지를 생각하고, 그 말이 자신의 어떤 기억과 닿아 있는지를 돌아본 뒤 글씨를 쓴다고 밝히고 있다. 「대사관」의 대사는 일종의 ‘자기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김명희가 영화의 대사를 다시 꺼내는 것은 영화를 추억하기 위한 행위라기보다, 그 한마디를 매개로 지나온 자신의 삶과 기억을 다시 들여다보는 행위에 가깝다.
그렇게 되살아난 대사는 다시 붓끝으로 옮겨져 문자예술로 전환된다. 작가는 대사에 비친 자신의 삶과 그 시간을 지나오며 축적된 기억을 되짚고, 그 속에서 다시 일어나는 미세한 감정의 울림을 붓끝에 실어낸다. 가느다란 동물의 털이 모여 이루어진 붓의 섬세한 촉수는 마음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먹은 그 보이지 않는 감정의 흔적을 화면 위에 드러낸다. 이때 글씨는 더 이상 영화 속 대사를 옮겨놓은 문자가 아니다. 한마디를 통해 되살아난 작가 자신의 기억과 감정이 남긴 심상(心象)의 흔적이다.
붓의 속도와 힘, 글자의 형태, 먹의 흔적, 색채와 여백을 통해 대사를 매개로 한 작가 자신의 내면적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은 작가가 선택한 여섯 편의 영화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꿈, <쉰들러 리스트>의 생명, <쇼생크 탈출>의 희망, <반지의 제왕>의 선택,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사랑, <인사이드 아웃>의 감정은 서로 다른 영화의 주제처럼 보이지만, 작가에게는 성장하면서 자신의 삶에 찾아왔던 서로 다른 질문들이다.
여섯 편의 영화는 여섯 개의 작품 소재가 아니라, 한 인간이 성장하면서 세계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보여주는 여섯 개의 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사관」은 작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작가는 마지막에 관객에게 “당신에게 아직 남아 있는 한마디는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 여기에서 작가의 클로즈업은 다시 관객에게로 이동한다. 작가가 영화의 대사를 통해 자신의 지나온 삶을 발견했듯이, 작품 앞에 선 관객 역시 한마디를 통해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되묻는다.
이처럼 이번 전시의 구조는 영화 속 인물에게서 시작된 한마디가 작가의 삶을 지나 작품이 되고, 그 작품이 다시 관객의 삶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김명희의 「대사관」은 한 줄의 대사가 인간의 삶을 통과하면서 어떻게 기억이 되고 감정이 되며, 다시 예술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공간 속에서 “나는 어떤 말에 마음이 움직였으며, 그 말은 나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이 질문을 작가 자신에게서 시작하여 관객에게까지 확장하는 것, 바로 그것이 김명희가 「대사관」을 열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 <죽은 시인의 사회> - ‘카르페디엠’
작가가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만난 ‘Carpe Diem-’의 대사는 그림을 그리고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현실에서는 다른 길을 선택해야 했던 중학생 시절, 이 한마디는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마음속에 남았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1959년 미국의 보수적인 명문 사립학교를 배경으로, 새로 부임한 영어교사 존 키팅과 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전통과 명예, 규율과 성취를 강조하는 학교에서 키팅은 학생들에게 정해진 답을 따르기보다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목소리로 삶을 선택할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오래전 이 학교를 다녔던 학생들의 사진 앞에서 라틴어 한마디를 들려준다. ‘카르페디엠’
키팅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은 비밀 모임 ‘죽은 시인의 사회’를 다시 만들어 시와 꿈을 나누며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간다. 그중 배우를 꿈꾸던 닐은 아버지가 정해놓은 삶과 자신이 원하는 삶 사이에서 갈등하다 끝내 비극적인 선택을 한다. 학교는 그 책임을 키팅에게 돌리지만, 떠나는 그를 향해 학생들은 책상 위에 올라 “O Captain! My Captain!”을 외치며 스스로 생각하고 살아갈 용기를 배웠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내 삶은 누구의 것인가”이다. 그래서 ‘Carpe Diem’은 한 번뿐인 삶을 타인의 뜻이 아닌 자신의 삶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를 묻는 말이다.
김명희에게 이 한마디가 오래 남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 타인의 대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비추는 말이 되었다. 하고 싶은 삶과 살아야 하는 삶 사이에서 그는 무엇을 선택했던가. 그리고 지금 자신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에게 ‘Carpe Diem’은 이미 살아낸 삶에 대한 선언이라기보다, 오랜 시간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 질문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Carpe Diem〉 작품은 강렬한 호소의 영문 주제에 한글의 작은 글자는 작가 자신의 작은 목소리를 끼워 넣고, 영화 속 주인공 닐처럼 극한 처지에 서 있는 자들에게 귓가에 대고 따뜻한 용기를 주고 싶은 마음 같다. 순지 위의 은묵은 빛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오래전 마음에 들어왔다가 삶의 어느 순간 다시 떠오르는 기억의 속성을 닮았다. 오랜 시간을 건너 현재의 자신과 중학생 시절을 만난 타인에게 되돌리는 질문일 수도 있다.
○ <쉰들러 리스트> - Life
<쉰들러 리스트>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인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가 유대인들을 구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처음에는 전쟁을 사업의 기회로 삼았던 쉰들러가 유대인들이 학살당하는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변화하고, 자신의 재산과 지위를 이용해 천여 명의 유대인을 죽음으로부터 구해내는 과정을 그린다. 특히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갈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공장에서 일할 노동자의 이름을 하나씩 명단에 올리는 장면에서, 한 사람의 ‘이름’은 더 이상 명부에 기록된 문자가 아니라 한 인간의 생명 그 자체가 된다.
작가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 머물던 시선을 비로소 타인의 삶과 고통으로 돌리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한 사람의 이름이 곧 한 사람의 생명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거대한 역사의 숫자 뒤에는 저마다 이름과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깨달음이었다. 전쟁과 학살이라는 거대한 역사는 수백만이라는 숫자로 기록되지만, 그 숫자를 하나씩 되돌려 놓으면 그곳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꿈이 있었으며, 살아가고 싶었던 한 사람의 구체적인 삶이 존재한다.
<쉰들러 리스트>는 그 시선을 자기 밖으로 돌려 ‘타인의 한 생명’을 클로즈업하게 한 영화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영화에서 이자크 슈테른(Itzhak Stern)이 쉰들러와 함께 구할 유대인들의 명단을 완성한 뒤 말한다.
“The list is life. All around its margins lies the gulf.”
“이 명단은 생명입니다. 그 가장자리 너머에는 심연(深淵:죽음의 깊은 구렁)이 놓여 있습니다.”
〈Life〉에서 김명희는 《쉰들러 리스트》의 흑백 세계를 회색 먹의 중첩으로 화면에 불러낸다. 흘러내리고 겹쳐진 먹의 흔적은 거대한 역사의 무게와 죽음의 그림자를 환기하지만, 그 한가운데에는 “이 명단은 생명입니다”라는 문장이 또렷하게 남는다. 영화에서 명단의 안과 밖이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였듯, 여기에서 이름 하나는 더 이상 문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존재이며 하나의 생명이다. 거대한 역사가 인간을 숫자로 지워갈 때, 김명희는 다시 붓으로 이름을 불러내어 ‘한 사람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고 묻는다.
<쉰들러 리스트>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화면 전체를 무겁게 채우면서 개인의 문제에서 타인의 생명과 역사적 비극으로 시선을 확장하고 있다.
○ <쇼생크 탈출> -〈다시, 빛〉 ― 빼앗을 수 없는 내면의 자유
은행가 앤디 듀프레인은 아내와 그 연인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선고받아 쇼생크 교도소에 수감된다. 폭력과 부패, 억압이 지배하는 감옥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도 앤디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는다. 동료 레드와 우정을 나누고, 교도소 도서관을 가꾸며, 음악을 통해 잠시나마 수감자들에게 자유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긴 시간을 견뎌 마침내 스스로 자유를 찾아간다. 영화는 감옥이라는 극단적인 공간을 통해 인간에게 자유란 무엇이며, 모든 것을 빼앗긴 상황에서도 끝까지 빼앗길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 중심에 ‘희망’이 있다.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한 레드에게 희망은 오히려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위험한 것이지만, 앤디에게 희망은 감옥도 빼앗을 수 없는 인간 내면의 마지막 자유이다.
김명희가 중학생 시절, 이 영화에서 발견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짓밟히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한 사람”을 보았다고 회고한다. 고립과 억압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고, 타인과 우정을 나누며, 마침내 자신의 삶을 향해 나아가는 앤디의 모습은 어린 김명희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았다.
〈다시, 빛〉이라는 작품은 김명희가 발견한 인간의 내면에서 끝내 빼앗길 수 없는 자유라는 점이 조형적으로 잘 드러난다.
《쇼생크 탈출》에서 앤디는 육체적으로는 감옥에 갇혀 있지만 자신의 정신까지 감옥에 내어주지는 않는다는 의지를 김명희는 작품 〈다시, 빛〉이 잘 보여준다.
세 화면의 붓질도 이러한 감정의 움직임을 서로 다른 형상으로 보여준다. 왼쪽 위 작품 곡선은 어둡고 무거운 감옥보다는 녹아내린 벽, 혹은 위로 향하는 날개 짓과 같이 희망적 이미지다. 한글로 경쾌하게 ‘희망은 꺾이지 않는 날개다’ 희망은 현실을 지워주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현실을 딛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왼쪽 아래 작품에서는 거대한 먹의 원환이 화면을 감싸고 있다. 마치 감옥의 벽처럼 안과 밖을 구획하지만, 그 한가운데에는 ‘내 마음속에는 음악이 있어요. 이건 누구도 빼앗아가지 못해요’라는 문장은 외부의 억압과 상관 없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의 중심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둥근 먹의 경계는 역설적으로 ‘갇힘’과 동시에 그 안에서 끝까지 지켜내는 정신의 공간처럼 읽힌다.
오른쪽 작품의 강한 S자형 붓질은 더욱 역동적이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거세면서도 거침없이 달리는 먹선 사이로 두려움·희망·자유에 관한 문장들이 흩어져 있다. 두려움이 인간을 가두는 힘이라면 희망은 그 경계를 넘어가게 하는 힘이다. 따라서 이 화면의 획은 정지된 벽이라기보다 막힌 곳을 뚫고 나아가는 운동과 탈출의 궤적에 가깝다.
여기에서 ‘빛’은 어둠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무엇이다.
○ <작은선택> <반지의 제왕>
<반지의 제왕>은 평범한 호빗 프로도 배긴스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위험한 여정을 떠나는 이야기다. 프로도는 뛰어난 전사도, 위대한 마법사도 아니다. 오히려 거대한 세계의 운명 앞에서는 너무나 작고 연약한 존재다. 그러나 누구도 쉽게 감당할 수 없는 반지를 맡게 되면서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거대한 운명 속으로 들어간다.
프로도 역시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주어졌는지를 괴로워한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운명 앞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인간이다. 거대한 악과 전쟁의 방향을 움직이는 것은 반드시 힘 있는 영웅만이 아니다. 프로도와 샘처럼 이름 없는 작은 존재들이 포기하지 않고 내딛는 한 걸음과 선택이 모여 결국 세계의 운명을 바꾸어간다.
김명희가 20대에 <반지의 제왕>을 만나 발견한 것도 바로 이러한 ‘작은 존재와 선택의 가치’였다. 작가는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결정하지 않은 일을 만나게 된다”고 말한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진 현실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 앞에서 한 개인은 때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작가는 이 영화에서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다. 주어진 운명의 크기가 한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운명 앞에서 내리는 작은 선택이 자신의 삶과 미래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은선택> 작품에서는 배경의 옅은 황색도 의미 있게 볼 수 있다. 강렬한 원색이나 짙은 먹으로 화면을 압도하지 않고, 밝은 색채가 순지 위에 미세하게 번져 있다. 이는 거대한 영웅적 힘보다는 작은 존재에게서 시작되는 가능성과 희망의 기운을 환기한다. 그 위에 놓인 글씨는 화면의 중심을 관통하며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의지를 세운다.
운명은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그 운명 앞에서 내딛는 한 걸음은 자신의 선택이다. 거대한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때로 거대한 힘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내리는 한 사람의 작은 결단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김명희가 이 작품을 통해 건네는 메시지일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 〈작은선택〉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작은 존재의 선택이 무엇을 바꿀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선택의 ‘크기’가 아니라 선택하는 존재의 의지다.
운명은 선택할 수 없을지라도, 그 운명 앞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선택할 수 있다. 김명희가 <반지의 제왕>에서 발견한 것은 거대한 영웅의 힘이 아니라, 평범한 한 사람의 작은 선택이 지닌 가능성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모습을 넘어 마음을 바라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김명희 작가 노트에서는 ‘사랑’이라는 감정, 특히 외형을 넘어 한 사람의 본질을 바라보는 사랑을 설명하는 영화로 읽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마법에 의해 하루아침에 노파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소녀 소피와 마법사 하울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젊은 소피는 황야의 마녀가 건 저주로 늙은 모습이 된 뒤 집을 떠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머물게 된다. 그곳에서 하울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외모 뒤에 감추어진 두려움과 상처, 불안과 외로움을 알아간다.
“마음이란 무거운 거야[A heart’s a heavy burden.]”는 영화 후반부 하울이 되찾은 심장의 무게를 느끼는 장면에서 소피가 하는 말이다.
또한 하울의 “나는 지금까지 충분히 도망쳤어. 이제 지켜야 할 게 생겼어. 바로 너야.[I've had enough of running away, Sophie. Now I've got something I want to protect. It's you]” 하울이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소피를 지키겠다고 결심하는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의 외형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점이다. 소피는 노인의 모습과 젊은 모습 사이를 오가고, 아름다운 청년 하울 역시 마법과 전쟁을 거치면서 때로는 인간의 형상마저 잃어간다. 그러나 모습이 변해도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갖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김명희의 고백에서 더 눈길을 끈다.
“영원한 사랑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바라보면 생각만 해도 순수했던 첫사랑의 기억을 발견합니다.”
<시간을 건너, 너에게 1~5> 의 작품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김명희가 발견한 사랑은 아름다운 외형에 대한 매혹이 아니라, 변화하는 모습 너머에서 한 사람의 마음을 끝까지 바라보는 일이었다.
그래서 〈시간을 건너, 너에게〉의 다섯 화면에서 사랑은 설렘만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나아가는 용기가 되고,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누군가를 지키려는 결단이 되며, 때로는 감당해야 할 ‘마음의 무게’가 된다. 특히 ‘마음’의 ㅁ을 먹의 덩어리로 형상화한 화면은 사랑이란 누군가를 마음에 들이는 순간 그 존재의 무게까지 함께 받아들이는 일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모든 말은 시간을 건너 작가 자신의 첫사랑과 만나면서 영화의 대사에서 기억의 언어로 변한다. 결국 작가가 이 연작에서 묻는 것은 하나다. “우리는 사람의 무엇을 사랑하는가.”
사람은 변하고, 모습도 변하며, 관계 역시 변한다. 그러나 한때 누군가를 조건 없이 바라보았던 마음과 그 시절의 감정은 기억 속에 남는다. 영화가 그 기억을 다시 불러낸 것이다.
○ <인사이드 아웃> - 감정은 모두 나의 일부다.
<인사이드 아웃>은 한 소녀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의인화하여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이다. 주인공 라일리는 부모와 함께 새로운 도시로 이사하면서 낯선 환경과 학교생활에 적응해야 한다. 영화는 이 과정에서 라일리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기쁨(Joy), 슬픔(Sadness), 버럭(Anger), 까칠(Disgust), 소심(Fear)이라는 다섯 감정이 서로 충돌하고 협력하면서 한 인간의 마음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기쁨’이 라일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슬픔’을 가능한 한 멀리하려 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뜻밖의 사실이 드러난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기쁨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슬픔을 표현해야 다른 사람의 위로를 받을 수 있고, 두려움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며, 분노와 까칠함 역시 자신을 보호하고 세계에 반응하는 감정이다. 결국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감정들이 함께 존재하면서 한 인간을 이루어간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인사이드 아웃>은 김명희의 <마음의 5가지 빛 1~5> 으로 특별하게 만난다. 컬러를 공부했던 작가에게 감정을 서로 다른 캐릭터와 색채로 시각화한 영화의 방식은 흥미로운 조형적 모티브가 되었다.
“우는 건 인생의 문제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진정하도록 도와줘.[Crying helps me slow down and obsess over the weight of life's problems.]”
라일리가 가출하려는 위기의 순간, 기쁨이는 슬픔이에게 콘솔을 맡기면서 말한다.
“슬픔아, 네가 해야 해.[Sadness, it’s up to you.]”
그는 작품에서 노랑·빨강·초록·파랑·보라를 사용하고, 패널 위로 버블처럼 번져가는 색채를 통해 서로 다른 감정의 움직임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김명희가 이 영화에서 발견한 것은 ‘감정=색채’라는 시각적 표현 방법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을 바라보는 태도의 변화다. 작가는 “기쁨만이 좋은 감정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슬픔과 분노, 두려움까지도 자신을 이루는 감정이며 그것을 인정하는 일이 곧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이 연작을 〈마음의 5가지 빛〉이라 이름 붙이고 “나의 모든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여기서 ‘빛’이라는 표현도 의미가 있다. 기쁨만이 빛나는 것이 아니라 슬픔도, 분노도, 두려움도 저마다 하나의 빛깔을 지닌다. 어느 하나를 지워버리면 온전한 자신 역시 설명할 수 없다.
1관을 나서며
대사관 1관에서 김명희가 수많은 영화 가운데 선택한 여섯 편은 작가가 성장하며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만났던 질문의 흔적이며, 오늘의 자신을 이루어온 여섯 개의 기억이자 여섯 개의 내면 풍경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는 꿈을 통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물었고, <쉰들러 리스트>에서는 생명을 통해 자신의 시선을 타인의 삶과 고통으로 확장하였다. <쇼생크 탈출>의 희망에서는 절망 속에서도 끝내 빼앗길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보았으며, <반지의 제왕>의 선택에서는 거대한 운명 앞에서도 작은 한 사람의 선택이 지닌 가치를 발견하였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는 사랑을 통해 외면 너머의 마음을 바라보았고, <인사이드 아웃>에 이르러서는 감정의 모든 빛깔을 인정하는 것이 곧 자신을 이해하는 길임을 깨닫는다.
이렇게 보면 여섯 편의 영화는 꿈―생명―희망―선택―사랑―감정이라는 여섯 개의 화두를 따라 한 인간의 시선이 성장하고 확장되어 온 과정이다. 처음에는 ‘나의 삶’을 묻던 시선이 타인의 생명을 향하고, 다시 삶을 견디는 희망과 선택의 문제로 나아가며, 사랑을 거쳐 마침내 자신의 복잡한 내면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 이른다. 영화는 달랐지만, 그 안에서 작가가 발견한 것은 결국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으며,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김명희는 이 기억들을 추억으로만 간직하지 않고. 오랜 시간 마음속에 남아 있던 영화의 한마디와 감정을 다시 꺼내 붓과 먹, 색채와 여백의 언어로 전환하였다. ‘Carpe Diem’은 지나온 꿈을 되묻는 글씨가 되고, <쉰들러 리스트>의 한 생명은 〈Life〉가 되며, 절망 속에서 지켜낸 희망은 〈다시. 빛〉으로 되살아난다. 작은 존재의 선택은 〈작은선택〉으로, 시간을 지나 남겨진 사랑은 〈시간을 건너, 너에게〉로, 서로 다른 감정들은 〈마음의 5가지 빛〉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 여섯 작품은 영화가 작가의 삶을 통과하고, 기억이 되고, 다시 감정이 되어 붓끝에서 새로운 형상을 얻은 결과다. 영화 속 타인의 언어에서 출발했지만, 그것을 오래 들여다본 끝에 작가가 발견한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섯 작품은 김명희가 지나온 시간을 여섯 번 클로즈업한 내면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제2관 〈복수극〉
김명희의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꿈과 생명, 희망과 선택, 사랑과 감정을 지나온 그의 시선은 제2관에 들어서면서 인간 내면의 보다 어두운 곳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작가가 마주한 감정은 ‘복수’다.
작가는 입구에서 먼저 “복수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스스로 그 출발점을 상실과 억울함, 오래된 상처에서 찾는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의 인물들은 저마다 복수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김명희가 이 영화들에서 바라본 것은 복수의 통쾌한 완성이나 선악의 판결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복수의 통쾌함보다 상처받은 인간의 얼굴”을 바라본다. 복수의 시작에는 언제나 상처받은 사람이 있지만, 그 사람이 자신의 상처를 되돌려주는 순간 또 다른 누군가가 상처받는다. 그렇게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고, 다시 그 가해자는 또 다른 복수의 대상이 된다.
그 첫 작품이 <복수는 나의 것>에서 가져온 〈엇갈린 상처〉다.
세 개의 캔버스 위로 거대한 검은 먹선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들어와 화면 한가운데에서 충돌하고 엇갈린다. 그것은 정제된 서예의 획이라기보다 서로에게 달려드는 감정의 궤적처럼 보인다. 한 획은 다른 획을 가로막고, 또 다른 획은 화면 밖으로 뻗어나간다. 작가의 설명처럼 글씨 역시 한 방향으로 정돈되지 않고 서로 부딪치고 흩어진다.
그 검은 흔적 사이에 “결국 나에게로 돌아오리”라는 문장이 놓인다. 이 한마디는 작품의 의미를 압축한다. 내가 타인에게 돌려준 상처는 그 사람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상처와 분노를 낳고, 마침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래서 작품 제목 〈엇갈린 상처〉는 상처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동하면서 피해와 가해의 자리를 끊임없이 뒤바꾸는 구조를 드러낸다.
특히 세 개의 캔버스를 하나의 평면으로 가지런히 맞추지 않고 높낮이를 달리한 점도 주목된다. 작가는 이 높이의 차이에 <친절한 금자씨>의 인물이 억울하게 감옥에서 보낸 13년이라는 시간을 끌어들인다. 따라서 화면의 어긋남은 설치상의 변주가 아니라, 복수의 배후에 축적되어 있는 뒤틀린 시간과 회복될 수 없는 삶의 간극을 공간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여기서 김명희는 다시 한번 영화의 대사를 ‘쓰는’ 데 머물지 않는다. 거친 먹선의 충돌과 캔버스의 높낮이, 문자의 방향과 공간의 어긋남을 통해 복수하는 인간의 심리 자체를 화면의 구조로 바꾸어 놓는다. 1관에서 대사가 자신의 기억을 비추는 거울이었다면, 2관에서 대사는 인간의 상처가 어떻게 또 다른 상처를 낳는지를 추적하는 통로가 된다.
그래서 작가가 이 작품 앞에서 던지는 질문,
“상처받은 사람은 언제 가해자가 되는가?”
복수는 언제나 자신에게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시작된다. 그러나 자신의 고통을 되돌려주는 순간 타인에게는 또 하나의 고통이 시작된다. 김명희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한 사람의 상처가 또 다른 사람의 상처가 되고, 그 상처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인간 감정의 순환을 검은 먹선으로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엇갈린 상처〉의 먹선은 상처가 지나간 길이며, 분노가 이동한 흔적이고,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복수의 궤적이다.
이제 이 검은 궤적을 따라가면 다음 영화 <올드보이>에 이른다. 김명희는 그곳에서 복수를 다시 세 단계로 나눈다. ‘추적―파국―공허’. 복수의 대상을 찾아가는 인간, 진실과 마주하면서 무너지는 인간, 그리고 모든 복수가 끝난 뒤 텅 빈 자리에 홀로 남겨진 인간을 차례로 바라본다.
상처에서 시작된 복수는 과연 어디로 향하는가. 그리고 모든 복수가 끝난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가. 이제 김명희의 붓은 그 질문을 따라 <올드보이>의 더 깊고 어두운 내면으로 들어간다.
○ 복수의 대상을 찾아서 ― <올드보이> 〈누구냐 너〉
〈엇갈린 상처〉에서 상처가 또 다른 상처를 낳는 복수의 출발을 보여주었다면, 김명희의 시선은 이제 <올드보이>로 옮겨가 복수하는 인간의 내면을 ‘추적―파국―공허’의 과정으로 따라간다. 그 첫 장면이 〈누구냐 너〉이다.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사설 감옥에 갇혀 15년의 시간을 빼앗긴다. 누가 자신을 가두었는지, 무엇 때문에 이런 형벌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풀려난 뒤 그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의 질문이다. “누구냐 너.” 그러나 이 질문은 복수할 상대의 이름을 묻는 말이 아니다.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더 나아가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는 절규에 가깝다.
김명희는 이 막막한 시간을 화면의 위와 아래로 갈라놓는다. 하단의 짙은 검정은 출구를 알 수 없는 감금의 시간처럼 화면을 무겁게 닫아버리고, 상단에는 적갈색의 얼룩과 수직으로 흘러내린 흔적들이 겹쳐 있다. 마치 오랜 시간 축적된 상처와 기억이 화면 위로 스며 올라온 듯하다. 그 어둠 한가운데 “누구냐 너”라는 네 글자만 금빛으로 떠오른다.
이 금빛은 밝은 희망의 빛이라기보다 어둠 속에서 끝까지 답을 찾아내려는 집요한 질문의 빛에 가깝다. 모든 것이 검게 닫힌 상황에서도 질문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글씨는 복수의 선언이라기보다 진실을 찾아가는 하나의 추적선이 된다.
그러나 <올드보이>의 비극은 복수의 대상을 찾아갈수록 자신이 원했던 답과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지 못했던 과거의 진실과 가까워진다는 데 있다. 처음에는 “누가 나에게 이런 짓을 했는가”를 묻지만, 진실에 다가갈수록 그 질문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이 지점에서 김명희가 작품설명 끝에 던지는 “진실을 알게 되면 복수는 끝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중요하다. 복수는 상대를 찾아내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상대와 자신을 이어놓은 과거를 발견하면서 더 깊은 비극으로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냐 너〉에서 김명희가 클로즈업한 것은 복수의 대상 그 자체가 아니다. 복수의 이유를 찾아 헤매는 인간의 집요한 질문이다. 화면을 뒤덮은 어둠 속에서 금빛으로 떠오른 “누구냐 너”는 타인을 향해 던진 질문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질문이 된다.
복수할 사람을 찾았다고 해서 상처의 이유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진실을 찾아 한 걸음 더 들어갈수록 오대수는 이제 복수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김명희의 다음 화면, ‘파국’이 시작된다.
○ 복수가 진실과 만나는 순간 ― <올드보이> 〈웃어라…〉
〈누구냐 너〉에서 김명희가 복수의 대상을 찾아가는 인간의 집요한 ‘추적’을 보여주었다면, 두 번째 작품 〈웃어라…〉에서는 마침내 그 추적이 진실과 충돌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 순간을 보여준다.
앞 작품의 검정과 금빛이 갑자기 자주·분홍·적색 계열로 변한다. 화면도 위와 아래로 갈라지고, 색은 가지런히 머물지 못한 채 거칠게 번지고 아래로 흘러내린다. 검정이 알 수 없는 진실을 찾아 헤매는 억눌린 시간이었다면, 여기서 붉은 계열의 색채는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사랑과 증오, 분노와 절망의 감정적 폭발에 가깝다.
<올드보이>에서 복수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으로 끝나지 않는다. 진실이 밝혀질수록 누가 복수하는 사람이고 누가 복수당하는 사람인지 그 경계마저 흔들린다. 김명희가 작품설명에서 “웃음과 울음, 사랑과 증오, 복수하는 사람과 복수당하는 사람”을 나란히 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서로 반대라고 믿었던 감정과 관계가 진실 앞에서 뒤엉키며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화면 역시 이러한 혼돈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위와 아래를 가르는 수평의 경계는 존재하지만 먹과 색은 그 경계를 지키지 않는다. 긁히고 번지고 흘러내리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한다. 특히 화면 아래로 길게 흘러내리는 적색과 자주의 흔적은 마치 감정이 더 이상 자신의 내부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쏟아져 내리는 모습처럼 보인다. 이 작품에서 색채는 글씨를 아름답게 꾸미는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 자체를 대신하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된다.
제목 〈웃어라…〉 역시 역설적이다. 웃음은 본래 기쁨의 표정이지만 <올드보이>에서 웃음과 울음, 사랑과 증오는 더 이상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가장 행복해야 할 기억이 가장 잔혹한 진실과 연결되고, 사랑이라고 믿었던 감정이 복수의 도구가 되면서 인간의 표정마저 하나의 의미로 규정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 작품의 ‘웃음’은 기쁨의 표정이라기보다 웃음과 울음의 경계가 무너진 인간의 얼굴에 가깝다.
여기에서 김명희가 바라보는 복수의 본질도 더욱 분명해진다. 복수의 끝에는 승자가 존재할 것 같지만, 진실에 도달한 순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서로의 파괴이다. 상대에게 고통을 되돌려주려 했던 복수는 결국 그 고통을 자신의 내부로까지 끌어들인다.
따라서 〈웃어라…〉는 복수의 절정이면서 동시에 복수의 허망함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복수는 상대를 무너뜨리는 동안 복수하는 자신도 함께 무너뜨린다. 김명희는 이를 설명하거나 판단하기보다, 충돌하는 글씨와 흘러내리는 색채로 보여준다.
그리고 모든 감정이 이렇게 극점에 도달하고 나면 더 이상 분노할 힘조차 남지 않는다. 붉게 타오르던 감정이 모두 소진된 다음에는 무엇이 남을 것인가.
김명희는 다음 작품에서 강렬했던 자주와 적색을 모두 거두어낸다. 그리고 회색과 은빛만 남은 〈사랑해요 아저씨〉로 이동한다.
추적에서 파국으로, 그리고 파국에서 공허로. 복수의 끝에 다가갈수록 화면은 오히려 말과 색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 복수의 끝에 남은 말 ― <올드보이> 〈사랑해요 아저씨〉
〈누구냐 너〉에서 복수의 대상을 추적하고, 〈웃어라…〉에서 진실과 마주하며 파국에 이르렀다면, 김명희는 세 번째 작품 〈사랑해요 아저씨〉에서 모든 것이 지나간 뒤의 공허를 바라본다. 복수는 끝났고 진실도 드러났다. 그러나 누구도 이전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복수의 완성은 상처의 회복을 의미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이 사라지고 변해버린 뒤였다.
앞 작품에서 화면을 뒤덮었던 자주와 적색은 여기에서 갑자기 사라진다. 김명희는 BLACK/GOLD → RED/PURPLE → GREY/SILVER로 색채를 변화시키면서 복수하는 인간의 감정이 소진되어 가는 과정을 시각화한다. 뜨겁게 타오르던 분노와 증오가 모두 지나간 자리에는 차갑게 식은 회색과 은빛만이 남는다. 그것은 평온이라기보다 더 이상 분노할 힘조차 남지 않은 감정의 잔해에 가깝다.
화면의 구성도 그러하다. 위쪽에는 검고 거친 흔적과 수직으로 흘러내리는 선들이 밀집되어 있지만, 아래쪽은 거의 비어 있는 회색의 공간으로 남겨져 있다. 앞선 두 작품에 비해 글씨 역시 현저히 작아졌다. 그 넓은 공백 속에 “사랑해요 아저씨”라는 한마디가 힘없이 떠 있다. 격렬하게 외치던 복수의 언어가 마지막에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가라앉은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따뜻한 사랑의 완성을 뜻하지 않는다. 작가는 오히려 이 장면을 “복수가 지나간 뒤의 공허함”으로 바라본다. 가장 따뜻해야 할 ‘사랑해요’라는 말이 가장 잔혹한 진실 뒤에 놓이면서 사랑과 절망이 한 화면 안에서 기묘하게 공존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사랑’은 위로나 구원이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현실 앞에 남겨진 인간의 마지막 감정처럼 들린다.
특히 화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검은 흔적은 복수가 끝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기억을 연상시킨다. 사건은 끝낼 수 있지만 기억까지 지울 수는 없다. 김명희가 말하듯 “복수는 끝났다. 그러나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보면 <올드보이>를 다룬 세 작품은 하나의 감정적 서사를 이룬다.
〈누구냐 너〉 ― 추적에서는 질문이 남았고,
처음에는 복수할 대상을 찾았지만, 끝에 이르러 발견한 것은 승리가 아니다. 상처받은 사람과 상처를 되돌려준 사람 모두가 무너진 뒤 남겨진 기억과 공허이다. 김명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복수의 허망함을 가장 절제된 화면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작가는 여기서 곧바로 다음 작품으로 가지 않는다. 〈사랑해요 아저씨〉와 <친절한 금자씨> 사이에 60~100cm의 빈 벽을 남긴다. 그 여백은 작품 사이의 간격이 아니다. 작가는 그것을 ‘복수가 끝난 뒤의 침묵’이라고 부른다.
이 부분은 서예미학적으로도 상당히 흥미롭다. 글씨를 쓰지 않은 공간이 오히려 가장 많은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추적과 파국, 공허를 지나 이제 말조차 사라진 자리에서 여백 자체가 하나의 대사가 된다.
그리고 그 침묵을 몇 걸음 지나면 관객 앞에 전혀 다른 ‘백색’이 나타난다.
김명희의 복수극은 이제 <친절한 금자씨>를 통해 복수 이후의 인간은 어떻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가, 곧 속죄와 회복의 문제로 넘어간다.
○복수가 끝난 뒤의 침묵 ― ‘여백’에서 <친절한 금자씨>로
<올드보이>의 마지막 〈사랑해요 아저씨〉에서 모든 감정을 소진시킨 김명희는 곧바로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그 사이에 아무것도 걸지 않은 60~100cm의 빈 벽을 남겨둔다. 작가는 이 공간을 “복수가 끝난 뒤의 침묵”이라고 명명한다.
이 ‘여백’은 2관에서 매우 중요한 조형적 장치이다. 앞서 검정과 금빛으로 시작된 복수는 적색과 자주의 파국을 지나 회색의 공허에 도달했다. 그리고 이제는 색도 문자도 사라진다. 검정 → 적색 → 회색 → 침묵 → 백색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감정은 점차 소진되고, 마침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서예에서 여백은 본래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아니다. 쓰인 획과 쓰이지 않은 공간이 서로를 살리며 화면의 호흡을 만든다. 그러나 김명희는 여기에서 여백을 한 걸음 더 확장한다. 쓰지 않음으로써 말하고,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감정을 느끼게 한다. 복수와 파국을 지나온 뒤에는 어떤 대사보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침묵을 지나 관객 앞에 나타나는 것이 <친절한 금자씨>의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이다.
여기서 화면은 극적으로 백색으로 바뀐다. 그러나 이 흰색을 순수나 완전한 구원의 색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작가에게 백색은 이미 깨끗해진 상태가 아니라 깨끗해지고 싶은 마음,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 가깝다. 실제로 작가는 “흰색은 깨끗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라고 밝히며, 그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인간의 마음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흰 화면은 완전히 매끈하지 않다. 표면에는 수없이 반복된 가느다란 흔적과 주름 같은 선들이 남아 있다. 마치 지우고 또 지워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기억처럼 보인다. 그 한가운데 아주 작은 글씨로 문장이 놓인다. 강렬한 색과 거대한 획으로 감정을 표출했던 앞선 작품들과 비교하면, 이제 작가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워진다.
바닥에 흩어진 흰 구체들도 중요하다. 깨끗한 백색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 표면에는 검정과 붉은 글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복수가 끝났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 기억과 상처의 잔여처럼 보인다. 작가가 설명하듯 벽의 문장과 바닥의 흩어진 형상은 하나의 답으로 정리되지 않는 기억과 감정을 공간 속에 남겨놓는다.
따라서 제목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는 의미심장하다. 복수가 끝나면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상처를 준 사람에게 복수하면 자신의 상처도 없어지는가. 죄를 씻으면 기억까지 지울 수 있는가. 김명희의 화면은 어느 것에도 쉽게 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흰색 화면에 남아 있는 수많은 흔적은 말한다. 인간은 다시 시작할 수는 있어도, 아무 일도 없었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친절한 금자씨>에서 김명희가 바라보는 것은 더 이상 ‘복수’ 자체가 아니다. 복수 이후의 삶이다. 상처를 되갚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모든 것이 끝난 뒤 그 기억을 안고 다시 살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 2관을 나서며
검정에서 적색으로, 적색에서 회색으로, 다시 침묵을 지나 백색에 도달한 김명희의 ‘복수극’은 결국 복수의 완성이 아니라 복수 이후의 삶을 묻는다. 흰색은 모든 죄와 기억이 지워진 순백의 상태가 아니라, 상처를 안고서라도 다시 살아가고 싶은 인간의 마음이다. 그래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작가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다시 살아갈 수는 있다. 어쩌면 복수 이후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망각도 또 다른 복수도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자신의 삶 안에 받아들이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인지도 모른다. 다시 3관으로 향한다.
제3관 〈한글관〉
복수의 끝에서 침묵과 백색을 만난 김명희의 시선은 이제 제3관 〈한글관〉으로 이동한다. 여기에서 영화의 이야기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 지금까지 그 모든 영화의 기억과 감정을 담아왔던 ‘한글’이 화면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1관에서 작가는 영화의 대사를 통해 꿈·생명·희망·선택·사랑·감정을 자신의 삶과 연결했고, 2관에서는 복수의 대사를 따라 상처·파국·공허·속죄라는 인간 내면의 어두운 곳까지 내려갔다. 그렇다면 3관에서 작가가 묻는 것은 조금 다르다. 그 수많은 대사와 감정은 무엇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어 왔는가. 결국 그것을 담아온 것은 ‘말’이었고, 그 말은 다시 ‘글’이 되어 우리 앞에 남았다.
그래서 3관의 핵심은 “말이 글이 되고, 글이 이미지가 되는 곳”이라는 작가의 선언에 있다. 지금까지 대사는 읽고 의미를 이해해야 하는 언어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김명희는 문자를 의미 전달의 도구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문장을 해체하고, 글자를 흩뜨리고, 다시 자음과 모음으로 분리하면서 ‘읽는 문자’에서 ‘바라보는 문자’로 시선을 이동시킨다.
이 지점은 서예미학의 관점에서도 중요하다. 문자는 본래 언어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호이지만, 붓을 만나는 순간 점과 획, 크기와 방향, 농담과 번짐, 공간과 여백을 가진 하나의 시각적 형상이 된다. 김명희는 바로 이 문자의 이중적 성격, 즉 ‘뜻을 전달하는 글’과 ‘눈으로 바라보는 형상’ 사이를 탐색한다.
그래서 3관에서는 작품을 액자 안에 가지런히 가두지 않는다. 한지의 주름과 번짐, 찢긴 듯한 가장자리와 투명성까지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이고, 작품을 벽에서 띄우거나 천장에서 늘어뜨려 관객이 그 사이를 지나가게 한다. 종이는 더 이상 글씨를 받아내는 바탕이 아니라 하나의 물질이 되고, 문자는 종이 위에 놓인 기록이 아니라 공간 속에 존재하는 형상이 된다.
○ 문장이 된 한글 ― 임금의 뜻에서 백성의 손으로
3관의 첫 장면 〈문장이 된 한글〉에서 김명희는 한글의 근원으로 돌아간다. 황갈색 한지 위에 적힌 것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어제서문」, 곧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한글 창제의 뜻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 역사적 문장을 엄정하고 장중한 서체로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크고 작고, 비뚤고 어눌하며, 때로는 장난스럽기까지 한 손글씨로 풀어놓는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세종의 근엄한 뜻과 그것을 받아 쓰는 백성의 자유로운 손 사이의 대비이다. 임금이 백성을 위해 만든 문자가 궁궐의 권위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입에서 말이 되고 손끝에서 글이 되어 저마다 편안하게 쓰이는 순간을 작가는 상상한다. 잘 쓰고 못 쓰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삐뚤빼뚤하고 서툴러도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말로 적을 수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훈민정음이 백성에게 가져다준 문자생활의 자유였을 것이다.
따라서 화면의 어눌하고 자유로운 글씨는 서법의 미숙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구나 쉽게 익혀 날마다 쓰게 하고자 한다’는 훈민정음 창제정신을 조형적으로 되받아낸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근엄한 왕의 말씀은 백성의 손에 건너오는 순간 생활의 문장이 되고, 반듯한 규범에서 벗어난 글씨는 말하듯 쓰고 쓰듯 즐기는 문자의 유희가 된다.
이렇게 보면 〈문장이 된 한글〉은 3관 전체에서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임금의 뜻에서 백성의 말로, 말에서 글로, 글에서 다시 자유로운 형상으로. 김명희는 한글의 탄생을 역사적으로 설명하기보다, 한글이 비로소 사람들의 손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을 삐뚤빼뚤한 글씨의 표정으로 되살려 놓는다.
○ 문자를 읽는 데서 바라보는 데로 ― 〈한글을 해체하다〉
〈문장이 된 한글〉에서 세종의 뜻이 백성의 손으로 건너와 살아 있는 문장이 되었다면, 다음 단계에서 김명희는 그 문장을 다시 해체한다. 이제 문장은 온전한 뜻을 전달하지 않는다. ㄱ·ㄴ·ㄷ·ㅁ·ㅂ·ㅅ·ㅇ과 같은 자음과 모음이 흩어지고 겹쳐지면서, 글자는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에서 벗어나 하나의 형태와 흔적으로 남는다.
두 작품의 화면은 짙은 회색과 흰색이 중첩되면서 마치 오랜 시간 문자가 쓰이고 지워지기를 반복한 벽면처럼 보인다. 왼쪽 작품에서는 자음과 모음들이 화면 곳곳에 흩어져 서로 겹치고 희미해진다. 어떤 글자는 선명하지만 어떤 글자는 배경 속으로 사라진다. 오른쪽 작품에서는 강한 수직선들이 화면을 분할하고 그 사이로 작은 문자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여기서 한글은 더 이상 문장을 이루기 위해 가지런히 줄을 서지 않는다. 문자의 질서가 해체된 자리에 점과 선, 면과 공간의 새로운 조형질서가 생겨난다.
이러한 변화는 서예의 관점에서도 흥미롭다. 서예에서 문자는 본래 ‘읽히는 의미’와 ‘보이는 형상’을 동시에 가진다. 그러나 김명희는 여기에서 의도적으로 의미를 뒤로 밀어낸다. 관객이 무슨 내용인가를 읽으려 할수록 문장은 잡히지 않고, 대신 ㄱ의 꺾임, ㅇ의 둥근 형상, ㅁ의 사각 구조, 수직과 수평의 반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문자가 언어에서 조형으로 이동하는 순간이다.
앞선 〈문장이 된 한글〉과 연결하면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하다. 세종이 백성에게 자신의 생각을 쉽게 기록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한글이 김명희의 화면에서는 다시 가장 근원적인 구성요소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작가가 말하는 ‘읽는다’와 ‘바라본다’는 문자의 의미를 잠시 내려놓고 한글 자체가 지닌 조형성을 발견하게 하는 시선의 전환이다.
○ 한글의 숲 ― 시간을 건너 문자와 만나다
〈한글의 숲〉에 이르면 김명희는 해체했던 한글을 다시 역사적 기억 속으로 불러낸다.
90×500cm의 긴 현수막으로 높이 걸고 관객이 그 사이를 통과하도록 한 것은 한글이 탄생하고 우리 삶에 들어온 시간 속을 걷게 하는 장치로 읽힌다.
길게 늘어뜨린 현수막에는 훈민정음의 창제정신과 그 원리와 쓰임을 밝혀놓은 『훈민정음』의 문장과 문자들이 펼쳐진다. 그것을 높이 걸어 관객이 그 사이를 지나도록 한 것은 관객의 몸을 한글이 탄생했던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일종의 시간여행에 가깝다.
그 사이를 걷다 보면 한글이 없었던 시간과 한글이 만들어진 이후의 시간이 자연스럽게 교차한다. 자신의 뜻을 자신의 문자로 충분히 표현하기 어려웠던 시대와, 새로운 문자를 얻어 말하고 쓰기 시작한 사람들의 시간이 한 공간 안에서 겹쳐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글자의 형태만이 아니라 문자가 탄생하면서 달라진 인간의 삶과 시간이다.
앞선 〈문장이 된 한글〉에서 세종의 근엄한 뜻이 백성의 손에 건너와 삐뚤빼뚤하고 편안한 생활의 글씨가 되었다면, 〈한글의 숲〉에서는 다시 그 근원으로 돌아가 문자를 만들고자 했던 장엄한 뜻과 오늘날 우리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한글의 모습을 하나의 기억 속에서 교차시킨다. 근엄함과 자유로움, 창제의 순간과 오늘의 일상, 역사와 현재가 한 공간에서 서로 마주하는 것이다.
〈한글의 숲〉에서 이제 관객은 글씨를 읽거나 바라보는 사람을 넘어 문자 사이를 직접 걸어가는 사람이 된다. 문장은 해체되어 글자가 되고, 글자는 다시 자음과 모음, 점과 획으로 돌아갔지만, 그 가장 근원적인 자리에는 결국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말로 표현하게 하려 했던 문자 창제의 뜻이 남아 있다.
영화가 끝났다. 이제 김명희는 우리를 영화관 밖으로 데리고 나온다. 어둑했던 극장을 나서 눈부신 바깥으로 나오니 어느새 경복궁의 뜰이다.
다음 편을 기대하며
김명희의 「대사관」은 영화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삶을 지나고, 다시 문자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영화는 끝났지만, 그 영화가 던진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오랜 시간 가슴에 남아 있던 그 질문들을 다시 붓끝으로 불러내어 하나의 조형 언어로 승화시켰다는 데 이번 작업의 의미가 있다. 결국 김명희에게 영화는 감상의 대상에서 삶을 성찰하는 거울이 되었고, 대사는 기억을 깨우는 언어가 되었으며, 붓과 먹은 그 기억과 감정을 다시 살아 있게 하는 예술이 되었다.
김명희의 이번 전시는 수많은 말과 이미지가 빠르게 소비되고 사라지는 오늘의 우리에게 잠시 멈추어 마음에 남은 한마디를 다시 들여다보라고 권한다. 타인의 말에서 자신의 기억을 발견하고, 그 기억을 통해 지나온 삶과 지금의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다. 결국 「대사관」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삶을 여기까지 데려온 한마디는 무엇인가요.”
질문에 답합니다. 니체 ‘Amor Fati’
이주형